Music

[81003]...밤과꿈...슈베르트

nextday 2008. 10. 3. 17:44

Franz Peter Schubert
슈베르트 / 오스트리아 작곡가. 빈 출생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오스트리아 작곡가. 빈 출생.
가곡을 비롯, 관현악곡·실내악·피아노곡 등 우수한 작품을 남겼으며, 독일 낭만파 초기를 대표한다. 1월 31일 교사이며 견실한 가톨릭교도인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와, 슐레지엔지방 출신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운 뒤, 리히텐탈교구교회의 오르가니스트 M. 홀처에게 사사하였다.
홀처는 슈베르트의 재능을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르치려 해도 이 아이는 벌써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밤과 꿈, Nacht und Traume, D.827

1808년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황실왕립신학교의 합창대원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A. 살리에리 등 당시 일류작곡가의 가르침을 받음과 동시에 친구 J. 슈파운이 조직한 학생관현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 뒤에 지휘자를 지냈다. 또 방학 때는 아버지·형들과 현악 4 중주곡을 즐기며 여러 음악체험을 쌓았다. 13년 신학교를 떠나기까지, 이미 도이치번호 82(이하 D로 약칭)의 교향곡 제1번, 현악 4중주곡, 가곡 등을 작곡하였다. 집에 돌아온 슈베르트는 사범학교를 다닌 뒤, 16년까지 아버지의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내성적이어서 교직은 힘들었으나 작곡면에서는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1814년 리히텐탈교회에서 작곡자 지휘 아래 연주된 미사곡 F장조(D105), 가곡 [실을 잣는 그레트헨, D 118], 15년에는 가곡 [방랑자의 밤의 노래, D 224] [들장미, D 257] [마왕, D 328]등이 있다. 슈베르트의 작품에 반한 친구들이 모여, 그의 음악을 즐기는 슈베르티아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8년과 24년 2회에 걸쳐서 J. 에스터하지백작의 집 음악가정교사로서 헝가리의 젤리츠에 초대되었다. 백작의 딸 마리와 칼로리네를 지도하기 위해서였다. 헝가리에 체류하는 동안 연탄용(連彈用)피아노곡 [헝가리의 디베르티멘토, D815, 작품 54]를 작곡하였다.

1816년 친구 F. 쇼버로부터 당시 유명한 오페라가수 M. 포글을 소개받았고, 이로 인해 슈베르트는 19년 오페레타 [쌍둥이, D 647]를 작곡했다. 그러나 다른 극장작품과 같이 이것도 몇 회 공연되었을 뿐 잊혀져 버렸다. 그의 이름은 오히려 21년 [마왕]이 작품 1로 출판되자 가곡작곡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포글은 이 시기, 슈베르트의 가곡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22년 작곡된 [미완성교향곡, D 759]은, 보통 교향곡이 4악장인 데 비해 제 2 악장까지밖에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왜 미완성으로 끝났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최근에는 22년 말에 발병한 매독 때문이라고 본다.

23년 병고 가운데 작곡된 가곡집이, 물레방앗간 직인의 슬픈 이야기인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 D 795, 작품25]이다. 그를 괴롭히는 병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명성은 차츰 오스트리아 국외로도 퍼져갔다. 25년에는 베를린에서 당시의 유명한 여성가수 A.M. 하우프트만이 [마왕]을 노래했으며, 슈베르트는 영국 작가 W. 스콧의 시 [호수의 숙녀]를 작곡한 [엘렌의 노래, D837∼839, 작품 52] 제3곡이 유명한 [아베마리아]에 영어 가사를 붙여 출판했다.

27년 제 5 곡의 [보리수]를 포함한 가곡집 [겨울나그네, D911, 작품89]를 작곡, 28년 3월에는 자작만으로 콘서트를 열어 성공을 거두고, 그 후 교향곡 [그레이트, D944], 현악5중주곡(D956), 가곡집 [백조의 노래, D957] 등의 대작을 완성시켰지만, 그해 11월 19일, 3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유해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빈의 베링묘지 L. 베토벤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작품

슈베르트의 작품은 작품번호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주 적고, 그것도 연대순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에는 O.E. 도이치가 전작품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일련번호인 도이치번호사용(또는 작품번호 병용)이 일반화되어 있다. 도이치의 작품목록에 의하면 슈베르트의 전작품은 998곡이며, 그 중 가곡은 630여 곡이다. 슈베르트는 그 이전에는 민요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은 가곡을 예술가곡 수준까지 높였다.

그 선율과 화성의 아름다운 변화, 반주피아노의 자율성 등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자주 <가곡의 왕>이라 불린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오페라·미사곡·교향곡·실내악·피아노곡 등에도 발휘되어 있어, 모두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각 장르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1) 교회음악
미사곡은 완성한 것이 6곡 있다. 제 5 번A 장조(D 678, 1822)와 제 6 번E 장조(D 950, 1828)가 현재에도 자주 연주된다. 소품이지만, [독일미사곡, D872, 1827]도 소년합창단 등의 연주에 의해 널리 친숙해져 있다.

(2) 무대작품
오페라가 3곡, 오페레타가 5곡, [로자문데, D797, 1823)] 외에 미완성곡이 10곡 있다.

(3) 합창·중창곡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슈베르트는 성악 카논, 3중창곡, 4중창곡 외에 규모가 큰 2중합창을 위한 작품 등, 이 악종에서 총 100곡 이상 작곡했다. 작자 생전부터 사랑받은 작품에는 남성 4 중창곡 [작은 마을, D598, 작품 11의 1, 1817] [곤돌라의 뱃사공, D809, 작품 28, 1824], 남성 8 중창과 저음현악기를 위한 [물 위의 정령들의 노래, D714, 작품 167, 1821], 여성 4 중창을 위한 [시편 23번, D706, 작품 132, 1820] 등이 있다.

(4) 교향곡
현재 남아 있는 완성곡은 7곡이지만, 미완으로 끝난 제8번 [미완성교향곡, D759, 1822]은 유명하다. 1828년 완성된 C장조 교향곡(D 944)은 R. 슈만이 말한 <천국적인 길이>를 가져, [그레이트, Great]라고도 한다. 또, 이 교향곡은 구(舊)슈베르트전집에서는 제 7 번으로 되었지만, 그 뒤 [미완성교향곡]보다도 뒤에 작곡된 것을 고려하여 제 9 번, 최근에는 [미완성교향곡]을 제 7 번, 이것을 제 8 번으로 부르고 있다. 이 교향곡은 최근 분실했다고 생각되었던 [그문덴가슈타인교향곡, D849]과 같은 작품이 아닌가라는 추측이 있다.

(5) 실내악
현악 4중주곡은 현재 남아 있는 완성작이 13곡 있다. 여기에 미완성 2곡(D 68과 D 703)을 합하여 제15번까지 일련번호가 붙여져 있다. 제13번 a단조 [로자문데, D804, 작품 29]와 제14번 d단조 [죽음과 소녀, D810]는 모두 느린 악장에 변주곡이 사용되었다. 피아노 5 중주곡 [송어, D667, 작품 114]에서도 제 4 악장에 자작의 가곡 [송어]를 주제로 한 변주곡을 사용하고 있다. 현악 5 중주곡(D 956, 1828)은 바이올린·비올라·첼로의 편성이며, 슈베르트의 실내악 중 최고걸작으로 꼽힌다. 그 밖에 피아노 3 중주곡, 선율악기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 몇 개 있다.

(6) 피아노곡
완성한 소나타는 13곡 있다. 그 밖에 리트(가곡) [방랑자, D493, 작품 4의 1, 1816]의 주제를 사용한 환상곡 [방랑자, D760, 작품 15, 1822], 2개의 즉흥곡집 (D899, 작품 90, 1827, D 35, 작품 142, 1827) 등이 있다. 또, 30곡을 넘는 여러 가지 연탄곡은 W.A. 모차르트의 작품과 함께 아직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7) 가곡
가곡 중에서 아름다운 작품이 매우 많다. 자연의 아름다움, 상쾌함을 노래한 것에 [물 위에서 노래한다, D774, 작품 72, 1823] [봄에, D882, 작품 101의 1, 1826] [세레나데, 들어라 들어라! 종달새를 D889, 1826] [초원의 노래, D917, 작품 115의 1, 1827], 음악에 대한 감사, 음악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에 [음악에 부쳐, D547, 작품 88의 4, 1817], 애심을 노래한 [그대는 나의 안식처, D776, 작품 59의 3, 1823], 세계의 자장가 중에서 가장 애호되고 있는 [자장가, D498, 작품 98의 2, 1816], J.W.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로부터의 3곡 [미뇽, D321, 1815;D 726과 D 727, 1821], 3곡의 [하프연주자의 노래, D478, 작품 12, 1816·1822] 등이 있다.

연표
AD 1797 1월 31일 오후 1시 30분 빈 북부에 있는 리히텔탈에서 출생.
1808 황실왕립신학교 합창대원. J. 슈파운과 교우 시작
1810 네손을 위한 피아노환상곡(Dl)
1811 최초의 가곡 《하가르의 탄식(D5)》. 최초의 오페레타 《거울의 기사(D-11, 미완)》
1813 변성기로 인해 신학교를 떠남. 교향곡 제 1 번(D-82)
1814 아버지가 경영하는 학교 조교사. 6월 미사곡 F장조(D105)를 완성, 10월에 리히텐탈의 <14개의 구난성인(救難聖人)교회>에서 초연하여 호평을 받음. 10월 19일 가곡 《실을 잣는 그레트헨(D118)》 외에 많은 괴테가곡을 만듦.
1815 8월 19일 가곡 《들장미(D257)》, 10월 가곡 《마왕(D328)》 외에 200곡 창작. 생애 중 최다작의 해
1816 3곡의 바이올린 소나타(D384·D385·D408). E장조의 현악 4 중주곡(D353). 가곡 《마부 크로노스에게(D369)》, 《자장가(D498)》. F. 쇼버·M. 포글과 교우
1817 3곡의 피아노 소나타(D537·D568·D575). 가곡 《음악에 부쳐(D547)》
1818 2월 최초의 인쇄악보 《에를라프호수》 간행. 7월~11월 헝가리의 J. 에스데르하지백작 집안의 음악가정교사
1819 2월 28일 최초의 가극콘서트. 피아노 5 중주곡 《송어(D667)》, 포글의 추천으로 오페레타 《쌍둥이(D647)》 제작
1821 4월 2일 《마왕》, 4월 30일 《실을 잣는 그레트헨》이 친구들에 의해 출판
1822 환상곡 《방랑자(D760)》, 변가장조미사곡(D678). 10월 30일 교향곡 제 7 번 《미완성(D759)》의 창작 시작
1823 5월 매독(·) 때문에 입원. 가곡집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D795)》, 극음악 《로자문데(D797)》
1824 3월 현악 4중주곡 《죽음과 소녀(D810》
1826 가곡 《세레나데(들어라, 들어라! 종달새를, D889)》
1827 3월 29일 L. 베토벤의 장례에 참석. 가곡집 《겨울나그네(D911)》
1828 3월 26일 처음이자 마지막인 자기작품에 의한 콘서트. 교향곡 제 8 번 《그레이트(D944)》. 9월부터 건강 악화. 3곡의 피아노소나타(D958·D959·D960) 완성. 11월 19일 31세로 죽음
1829 가곡집 《백조의 노래(D957)》 간행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빈의 리히텐탈에서 출생.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가곡의 왕’으로 불리고 있다. 아버지 프란쯔 테오도르는 모라바의 농가 출신, 어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도 모라바의 직공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 프란쯔 테오도르는 빈으로 와서 교원 양성교육을 받고 리히텐탈에서 국민학교를 경영하였다. 프란츠 페터는 그 넷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어 8세 때부터 아버지와 근처의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부터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 오르간을 배우고 1808년 왕실예배당의 소년가수 시험에 합격하여 국립신학교(Staatkonvikt)라는 기숙사에 수용되어 피어리스트 수도회의 규정에 따르는 훈련 및 일반교육과 일류 교사로부터의 음악교육을 받았다.
특히 살리에리가 그의 음악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작곡 및 그 밖의 것을 가르쳤다.

재학 중에는 학생 오케스트라에 참가하여 모짜르트 하이든 등 의 서곡. 교향곡을 익히고, 예배에서는 미햐엘 하이든 폭스 에베를린 등의 곡을 노래 불렀다. 정 지휘자 부재중에는 지휘봉을 드는 일도 있었고 또 저명한 극장의 오페라를 들을 기회도 많았으며, 여러 가지로 재능을 키울 기회도 많았을 뿐 아니라 평생 변함없는 우정을 나눈 요제프 시파운을 사귀게도 되었다. 1813년에 변성기가 와서 콘빅트를 떠났으나 때때로 이곳으로 와서 작곡 등의 레슨을 받았다. 재학 중에 이미 상당한 작품을 완성하였는데 그 중의 어떤 것은 습작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었다.

1년간의 교원양성 과정을 마치고 아버지 학교의 조수로 일하면서 대작에 착수하여 제1교향곡 D장조를 완성하였고 이어서 오페라 <악마의 별장>에 착수하여 1814년 5월 14일에 완성하였으나 살리에리의 지도에 따라 개작하여 10월에 완성하였다. 6월에는 F장조의 미사곡을 완성하였고 10월에 리히텐탈의 <14개의 구난성인 (救難聖人)교회에서 초연하여 호평을 받아 프란쯔 페터의 이름이 빈 시민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이때 소프라노 독창을 한 이웃 상인의 딸 테레제 그로프는 슈베르트가 평생을 수 없던 애모(愛慕)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 해 10월에 작곡한 <실을 잣는 그레트헨>은 그의 가곡의 장래의 방향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1815년 18세 때는 생애 중에서도 드문 다작(多作)의 해로서, <들장미> <마왕> <끊임없는 사랑> 등의 명작을 포함하는 약 145개의 가곡, G장조의 미사곡, 제2교향곡 Bb장조, 오페라는 미완성의 것을 포함하여 4곡, 그 밖의 것이 작곡되었다. 외적인 생활은 단조롭고 그 때까지도 조교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시파운의 소개로 괴팍한 문학청년 마이어호퍼와 알게 되었다.

시파운은 슈베르트가 그때까지 만든 괴테의 시곡(詩曲)을 정서시켜서 정중한 편지와 함께 괴테에게 보냈지만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편지를 제외한 악보는 반송되어 왔다. 조교사의 일에 싫증이 난 그는 라이바하의 교원양성학교의 음악교사의 자리를 얻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16년 5월 청년 쇼버의 권고로 그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되어 작곡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었으나 아직도 조교사의 일을 계속한 듯하다. 12월 쇼버의 어머니가 빈으로 나와 넓은 집에서 살게 되었으므로 슈베르트는 교직을 물러나서 그 집안의 신세를 지면서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얻었다.

1818년은 그가 21세 되는 해이다. 이해 초에 과거부터 교우관계가 있었던 작곡가 안제름 휘텐브레너의 동생이자 관리이던 하인리히와 교제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람은 슈베르트의 재능을 깊이 존경하여 힘이 미치는 한 이 천재를 세상이 인정하게 하고 물질상의 손해를 입지 않도록 슈베르트가 죽은 후에까지도 계속 돌봐 준 사람이었다. 5월 1일 슈베르트의 서곡의 하나 하나가 유료 공개연주회의 프로그램에 실려 기악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떨치게 되었다.

7월부터는 에스테르하지 백작가의 음악 가정교사로 채용되어 그 두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해 헝가리에 있는 그 사람의 대농원의 저택으로 갔다. 여기에서 그는 몇 개의 가곡과 피아노 연탄곡을 만들기도 하면서 심신의 건강을 모두 회복하였다. 이 두 딸 중에서 카롤리네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9월 빈으로 돌아와서 부터는 부친 학교에서의 교편생활은 그만두고 마이어호퍼와 동거하면서 오페레타 <쌍둥이>에 착수하였다. 이 해에는 가곡의 작품이 적다.

1819 년에는 롯시니의 오페라가 빈 시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베토벤과 같은 작곡가조차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으므로 앞서의 경(經) 오페라의 공연에 대한 노력은 포글의 동분 서주에도 불구하고 당장에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슈베르트는 오페라 작곡열에 들떠서 마이어호퍼의 가사에 작곡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어서 음악이 있는 극 <마법의 수금(竪琴)을 위한 음악을 완성하였다. 그 서곡은 1827년에 이르기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종교적 음악극 <라자로의 소생>은 미완성이지만 그 대부분은 극히 뛰어나 있다. 가곡으로서는 <프로메테우스>라는 명작이 있다. 이 해 그는 또 괴테에게 그의 시를 가사로 한 가곡 악보를 헌정하였으나 회답 편지도 받지 못하였다.

이해에는 콘빅트 시대의 학우 젠의 정치범죄에 억울하 게 연루되어 경찰서에 유치된 일도 있다. 그래서 그 후에도 그는 정부 교회 등에 대한 불만을 어떤 형태로든 간에 나타내어 울분을 푼 일도 있다. 1820년은 슈베르트에게 있어서는 기쁜 해였다. 4월에는 e단조의 서곡이 그라쯔에서 공개연주 되고 6월 14일에는 <쌍둥이>가 포글의 주연으로 쾰른트나트아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그러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7회로 중단하고 말았다. <마법의 수금>도 이 해에 공연되었다.

이러한 일들보다 더 기뻤던 일은 <마왕>이 친구들의 예약으로 출판할 공산이 섰다는 점이다. 이듬해 4월에 발행되었는데 상당액의 이익이 생겼으므로 <실을 잣는 그레트헨>도 발행되고 이어서 몇 개의 다른 곡들도 출판되었다. 그러나 창작은 적어서 <봄의 신앙>과 남성 8중창, 저음현 반주의 <물위의 정령의 노래>의 제1고(稿)가 주된 것이었다. 후자는 이듬해 1821년 가필하여 공연되었다. 다음해도 가곡의 수는 결코 많지 않으나 <인간의 한계> <줄라이카의 노래> 중 의 2곡, <미뇽의 노래> 2곡 등의 뛰어난 작품이 있다.

오페라 작곡열은 조금도 식지 않아서 쇼버의 가사에 의한 <알폰소와 에스트렐라>에 착수하였으나 연내에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이 해에 화가 쿠펠뷔저와의 교제가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의 주변에는 많은 예술가나 그 애호자가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보다 조금 뒤에 화가 폰 쉬빈트도 슈베르트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 중의 하나가되었다. 이 두 사람 의 화가에 의하여 슈베르트의 초상이나 그의 생활 장면 등이 그림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었다.

1820년경부터 그의 창작력은 상당한 쇠퇴를 보이는데 이것은 1818년경에 걸린 성병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822년에 베토벤을 방문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것은 후에 유명한 음악 평론가가 된 로흘리쯔가 아내와 친구에게 쓴 편지를 근거로 하여 나온 소리이지만, 이 편지는 어떤 고의적인 의도에 의한 위조임이 밝혀졌다.

또 이 로흘리쯔는 모짜르트가 자신의 창작태도를 자세하게 기술한 편지를 위조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해는 전해나 그 전해보다 수확이 많았던 해였다.

피아노곡으로서는 <34개의 감상적인 왈츠> <악흥(樂興) 의 때> <12개의 독일 무곡> 등이 있다. 게다가 이해부터는 슈베르트를 둘러싸고 그의 새 작품을 듣는 모임이 여기저기의 가정에서 개최되게 되었다. 이것을 슈베르티아데라 하였다. 시타이어와 그라쯔의 음악협회는 그를 명예회원으로 추천했고, 전자에게는 b단조 <미완성>교향곡을 보냈다. 10월 25일 베버의 <오이리안테>가 빈에서 공연되어 이 기회에 슈베르트는 그 작곡자와 면담하였는데, 이때 평을 해 달라는 청을 받고 솔직하게 혹평을 하였으나 베버는 화를 조금도 내지 않고 오히려 나중에 <알폰소와 에스트렐라>를 공연시키려고 무진 애를 써 주었으나 끝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오페라에는 계속 실패였으나 1825년 2개의 피아노 소나타 A장조, Op.42와 D장조, Op.53은 호평을 받았고 특히 전자는 곧 출판되어 북독일 스위스의 음악애호가들을 기쁘게 했다. 이 해 처음으로 친구인 화가 쉬빈트의 이웃으로 이사하여 그들의 친분도 더욱 두터워지고 또 슈베르티아데도 큰 성황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지병이 재발하여 생활을 어둡게 하였다. 5월 포글과 함께 시타이어로 갔는데 그 도중에 가시타인의 온천장에 체재하면서 가시타인 교향곡을 작곡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전혀 없고, 현지로서는 1828년에 완성한 C장조의대형 교향곡의 일부 초고가 여기에서 쓰여졌다고 인정되고 있는 정도이지만 이것도 정설은 아니다.

피아노 소나타는 그가 신처럼 존경한 베토벤의 만년의 스타일에, 슈만 비슷한 젊음, 게다가 그에게 독특한 서정성의 혼합이라 생각되지만, 원래 베토벤과 같은 구축성이 강한 단계를 거치고 난 자유로움이 아니기 때문에 이완된 부분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방랑자 환상곡>의 어떤 부분은 완전히 슈만적이며 또 연주 기교면에서는 리스트 에 가깝다.

<악흥의 때> <즉흥곡>은 멘델스존이나 슈만의 소곡 연작의 직접적인 선구(先驅)이며, 19세기 후반에 무수히 만들어진 서정소곡 또는 살롱 피스의 출발점이 되었다. 피아노 연탄곡과 중(합)창곡도 마찬가지로 당시의 유행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대형의 교회음악은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성악적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오케스트라의 표현력을 중시한 교회음악과 상당히 거리가 먼, 그에게 독특한 스타일을 갖고 있다. 그의 2대 미사곡이 모두 크레도의 전례문의 일부를 빠뜨리고 있는 사실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갖가지 추측을 낳게 하고 있으며, 그가 교회를 부정하였다는 설도 있었으나 이것은 지나친 생각이었을 것이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출처: 자연과 도시/cafe.daum.net/sound7080